오늘의 QT
Q U I E T - T I M E

새벽설교노트 - 요한복음 7:19-24 - 문소운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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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8 21:15
조회
309
03/12/2020
본문: 요한복음 7:19-24
제목: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설교자: 문소운 목사님
찬송가: 내가 예수 믿고서 (421장)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모세를 통해서 너희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그런데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때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 이었을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줄임말로 ‘마상’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상이었을 것이다. 왜인가? 억울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던 사람이었고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지금 율법을 안 지키고 있다’하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일 율법이랑 담 쌓고 지내는데 누가 와서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하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그 행함이 헛된 행함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지키고 있던 유대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왜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려고 연구하고 열심을 다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 본문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어 갈 수 있을까? 말씀에 열심히 순종하며 제자의 삶을 우리는 모두 살길 원하는 줄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유대인처럼, 바리새인처럼 헛된 행함이 아닌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행함으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유대인들의 이 시대에 어떠한 관점으로 율법을 바라보았는지 생각해 보길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은 자랑이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더욱 열심히 였다. 그들은 이전에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눠지고 두 나라가 이방의 침략 때문에 나라가 망한 이유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렸던 결론은 무엇이냐면 ‘아!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우리 나라가 망했었고 나의 가족들이 이방땅으로 끌려갔었고 노예로 살았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때 유대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더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분명히 로마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이랬을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로마 통치에서 자유하게 해 주실 것이다.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셨다. 오늘 그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한 가지 일이 있었다.
(요한복음 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예수님께서 내가 한가지 일을 행했는데 너희가 이것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를 잡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무슨 일이였는데 바로 요한복음 5장에 나왔던 바로 베데스다의 앉은뱅이를 낫게 했던 일이다.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그 베데스다의 연못에 물이 동할 때 들어갈려고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소망없이 살아가던 그 형제를 고치셨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 사건 때문에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그 앉은뱅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일어나서 너희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 말씀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가 앉아있던 그 자리, 거적대기를 짊어지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38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던 그 앉은뱅이가 걷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은 그 앉은뱅이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던 거적대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거적대기를 들고 있는 행위가 안식일을 어기는 일임을 인지하고 그에게 묻는다.
“ 너 왜 이 짐을 가지고 다니느냐? 오늘이 안식일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
이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인간이 짐을 가지고 다니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아니 우리가 옛날부터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나라가 망했고 , 우리 가정이 무너졌고, 내가, 조상들이 끌려가서 노예로 살았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사람이 지금 안식일에 짐을 들고 다니면서 그 거적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장면을 보고 유대인은 폭발했던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들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이 한가지 일,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인들을 잡아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 그 자리를 들고 가라!” 앉은 뱅이가 일어나서 걸은 그 내용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짐을 들고 안식일날 움직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앉은뱅이에게 명령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유대인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왜 그들의 행함이 헛된 행함인지 잘 가르쳐 주고 계신다.
유대인들은 결국 이 율법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 통치받기가 싫었다. 그리고 내 가족이 피해 보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른 나라 통치 가운데 있고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하고 내 가족들이 피해보고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자신이 행복하길 바랬다. 그런데 그 행복을 이루는 수단이 무엇이냐 ‘내가 율법을 안 지키면 불행해지고 내가 율법을 지키면 행복이 따라 오는 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앉은 뱅이가 낮음을 알았을 때 앉은뱅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어기고 있던 그 안식일에 대한 거적대기를 바라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쏙 빼놓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누군가 율법을 어기고 있구나!’ 그 율법의 잣대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율법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율법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에 크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함이, 나의 모든 움직임이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잘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먼저 왔는가? 아니면 구원이 먼저 왔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구원을 허락하셨다. 애굽땅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었던 그 백성들은 하나님은 먼저 구원해 내시고 그 이후에 율법을 주셨다. 그 애굽 군대로 부터 열가지 재앙을 통해 이끌어 내셨고 홍해를 가르시고, 모든 애굽 군대들과 자신을 따라오던 모든 권세와 능력들을 다 무너뜨리시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왔던 것은 율법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놓으시고 나서 그 이후에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돌려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먼저 부어주시고 그 이후에 행함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 먼저 구원해 놓으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 우리의 구원을 십자가에서 먼저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이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우리가 착해서, 우리가 멋진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죄많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셔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이제 아들과 딸된 우리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이렇게 사는거야”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더라도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항상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진 일을 사도 바울은 먼저 설명한다. ‘복음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부어진 그 은혜가 무엇이다’라고 먼저 설명을 한 후에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행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그 순서를 완전히 바꿔놓고 율법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은혜를 통해서 행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함을 통해서 은혜를 구할려고 했던 것이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려고 하고 자신들의 율법을 통해서 은혜를 구할려고 했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행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행함의 결과가 은혜가 되면 안된다. 행함의 결과가 은혜가 되는 순간 우리가 은혜를 위해서 행하는 순간, 그것은 율법에 매인삶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값싼 은혜이며 참된 제자의 삶이 아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부어주신 그 은혜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삶, 나를 움직이는 것이, 나를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기도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과 격려를 하는 것이 내가 무엇을 얻기를 위함이 아니요 내가 이미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을 내가 그냥 가지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치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함인줄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 헛된 행함이 아니라 참된 행함으로 여러분이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그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을 이 아침에 다시 한번 기억하며 오늘 이 하루 참된 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가 떨어지면 안되겠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가 떨어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면 우리가 겉모습으로 판단하게 된다.
(요한복음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즉 겉모습에만 치중하지 말고 바른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신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공의롭게 바르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것만 보면 그 은혜가 떨어지고 그 은혜에 반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보았던 것은 바로 거적대기였다. 베데스다의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방금 놀라운 일을 이루시고 38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뛰어서 걸어다니는 그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가지고 있던 거적대기였다. 겉보습에만 치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영적으로 무슨일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보지 못하고 그 앉은뱅이가 들고 있는 짐, 거적대기를 바라 보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은혜가 넘칠 때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오히려 바라보게 된다.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고 있는 일들,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 하늘나라의 일들이 우리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진정으로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확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만약에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그 앉은뱅이가 거적대기를 들고 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거적대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것이다. 거저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저 우리를 치유하시고 낫게하식고 다시 한번 싸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어느 곳에 우리의 시건을 두고 있는가? 그 거적대기인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그 은혜를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것임을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루 하루의 삶이 모든 움직임이 그 은헤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하겠다.
오늘 아침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을 읽은 것도 내가 해야 되서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 넘치고 넘치고 넘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나 많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다시 한번 하나님을 사모하며 주님앞에 나아갑니다.’
이 고백으로 주님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 이 하루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축복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나의 목적과 나의 수단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온전히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성경을 보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흘러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흘러 넘치게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 마음가운데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찬양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가만히 잊을 수 없게 은혜를 충만히 부어 주시옵소서!
교육부와 다음세대를 위해
본문: 요한복음 7:19-24
제목: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설교자: 문소운 목사님
찬송가: 내가 예수 믿고서 (421장)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모세를 통해서 너희에게 율법이 주어졌다. 그런데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때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 이었을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줄임말로 ‘마상’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상이었을 것이다. 왜인가? 억울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던 사람이었고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지금 율법을 안 지키고 있다’하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일 율법이랑 담 쌓고 지내는데 누가 와서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하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그 행함이 헛된 행함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지키고 있던 유대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왜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려고 연구하고 열심을 다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오늘 본문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어 갈 수 있을까? 말씀에 열심히 순종하며 제자의 삶을 우리는 모두 살길 원하는 줄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유대인처럼, 바리새인처럼 헛된 행함이 아닌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행함으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유대인들의 이 시대에 어떠한 관점으로 율법을 바라보았는지 생각해 보길 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은 자랑이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더욱 열심히 였다. 그들은 이전에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눠지고 두 나라가 이방의 침략 때문에 나라가 망한 이유를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렸던 결론은 무엇이냐면 ‘아!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우리 나라가 망했었고 나의 가족들이 이방땅으로 끌려갔었고 노예로 살았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때 유대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더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분명히 로마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이랬을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로마 통치에서 자유하게 해 주실 것이다.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셨다. 오늘 그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한 가지 일이 있었다.
(요한복음 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예수님께서 내가 한가지 일을 행했는데 너희가 이것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를 잡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무슨 일이였는데 바로 요한복음 5장에 나왔던 바로 베데스다의 앉은뱅이를 낫게 했던 일이다.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그 베데스다의 연못에 물이 동할 때 들어갈려고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소망없이 살아가던 그 형제를 고치셨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 사건 때문에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그 앉은뱅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일어나서 너희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라 말씀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가 앉아있던 그 자리, 거적대기를 짊어지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38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던 그 앉은뱅이가 걷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은 그 앉은뱅이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던 거적대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거적대기를 들고 있는 행위가 안식일을 어기는 일임을 인지하고 그에게 묻는다.
“ 너 왜 이 짐을 가지고 다니느냐? 오늘이 안식일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
이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인간이 짐을 가지고 다니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아니 우리가 옛날부터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나라가 망했고 , 우리 가정이 무너졌고, 내가, 조상들이 끌려가서 노예로 살았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사람이 지금 안식일에 짐을 들고 다니면서 그 거적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장면을 보고 유대인은 폭발했던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를 들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이 한가지 일,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인들을 잡아서 죽이려고까지 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 그 자리를 들고 가라!” 앉은 뱅이가 일어나서 걸은 그 내용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짐을 들고 안식일날 움직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앉은뱅이에게 명령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유대인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왜 그들의 행함이 헛된 행함인지 잘 가르쳐 주고 계신다.
유대인들은 결국 이 율법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 통치받기가 싫었다. 그리고 내 가족이 피해 보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른 나라 통치 가운데 있고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하고 내 가족들이 피해보고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자신이 행복하길 바랬다. 그런데 그 행복을 이루는 수단이 무엇이냐 ‘내가 율법을 안 지키면 불행해지고 내가 율법을 지키면 행복이 따라 오는 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앉은 뱅이가 낮음을 알았을 때 앉은뱅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어기고 있던 그 안식일에 대한 거적대기를 바라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쏙 빼놓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누군가 율법을 어기고 있구나!’ 그 율법의 잣대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율법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율법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에 크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함이, 나의 모든 움직임이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잘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먼저 왔는가? 아니면 구원이 먼저 왔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구원을 허락하셨다. 애굽땅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었던 그 백성들은 하나님은 먼저 구원해 내시고 그 이후에 율법을 주셨다. 그 애굽 군대로 부터 열가지 재앙을 통해 이끌어 내셨고 홍해를 가르시고, 모든 애굽 군대들과 자신을 따라오던 모든 권세와 능력들을 다 무너뜨리시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왔던 것은 율법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놓으시고 나서 그 이후에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돌려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먼저 부어주시고 그 이후에 행함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 먼저 구원해 놓으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 우리의 구원을 십자가에서 먼저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이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우리가 착해서, 우리가 멋진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죄많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셔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이제 아들과 딸된 우리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이렇게 사는거야”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더라도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항상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진 일을 사도 바울은 먼저 설명한다. ‘복음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부어진 그 은혜가 무엇이다’라고 먼저 설명을 한 후에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행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그 순서를 완전히 바꿔놓고 율법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은혜를 통해서 행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함을 통해서 은혜를 구할려고 했던 것이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려고 하고 자신들의 율법을 통해서 은혜를 구할려고 했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행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행함의 결과가 은혜가 되면 안된다. 행함의 결과가 은혜가 되는 순간 우리가 은혜를 위해서 행하는 순간, 그것은 율법에 매인삶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값싼 은혜이며 참된 제자의 삶이 아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한하게 부어주신 그 은혜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삶, 나를 움직이는 것이, 나를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기도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과 격려를 하는 것이 내가 무엇을 얻기를 위함이 아니요 내가 이미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을 내가 그냥 가지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치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함인줄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 헛된 행함이 아니라 참된 행함으로 여러분이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그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을 이 아침에 다시 한번 기억하며 오늘 이 하루 참된 행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가 떨어지면 안되겠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가 떨어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면 우리가 겉모습으로 판단하게 된다.
(요한복음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즉 겉모습에만 치중하지 말고 바른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신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공의롭게 바르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보이는 것만 보면 그 은혜가 떨어지고 그 은혜에 반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보았던 것은 바로 거적대기였다. 베데스다의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방금 놀라운 일을 이루시고 38년 동안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뛰어서 걸어다니는 그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가 가지고 있던 거적대기였다. 겉보습에만 치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영적으로 무슨일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보지 못하고 그 앉은뱅이가 들고 있는 짐, 거적대기를 바라 보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은혜가 넘칠 때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오히려 바라보게 된다.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고 있는 일들,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 하늘나라의 일들이 우리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진정으로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확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만약에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그 앉은뱅이가 거적대기를 들고 다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거적대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것이다. 거저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저 우리를 치유하시고 낫게하식고 다시 한번 싸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어느 곳에 우리의 시건을 두고 있는가? 그 거적대기인가?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그 은혜를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것임을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루 하루의 삶이 모든 움직임이 그 은헤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하겠다.
오늘 아침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을 읽은 것도 내가 해야 되서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 넘치고 넘치고 넘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나 많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다시 한번 하나님을 사모하며 주님앞에 나아갑니다.’
이 고백으로 주님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 이 하루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축복에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나의 목적과 나의 수단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온전히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성경을 보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흘러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흘러 넘치게 주님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 마음가운데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찬양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으면 가만히 잊을 수 없게 은혜를 충만히 부어 주시옵소서!
교육부와 다음세대를 위해